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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오키나와
2016.02.23 10:44

오키나와 기행을 다녀와서 -박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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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전화번호로 문자가 왔다. 길목협동조합에서 2016년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준비 중인데 관심 있는 사람은 홈페이지를 참조하라는 내용이었다. 링크된 홈페이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프로그램이었고, 별다른 갈등 없이 참가신청을 했다. 지금도 그 문자를 누가 보냈는지 여전히 모른다.

 

1.

17일 첫째 날, 인천공항에서 참가자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대부분 서울 경기에 거주하는 새민족교회, 향린교회, 들꽃향린교회 교우들이었고, 대구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우리와 함께 지방에서 올라온 분이었다. 평화기행의 실무간사인 도임방주씨도 처음으로 만났다. 첫 인상이 좋았다. 첫 만남이라 겉돌던 우리를 이성형씨가 살갑게 맞아주었다. 그렇게 첫 날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 나하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통역을 맡아준 김연실씨와 만났다. 제주 중문근처의 중산간 출신이라는 씩씩한 아가씨였다. 일본에 2009년부터 거주하다가 중일본을 휩쓴 쓰나미로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왔고, 시골이 좋아서 오키나와로 온지는 1년 정도 되었는데, 평소에는 호텔에서 접수업무를 하지만 스케줄을 조정해서 이번 기행의 통역을 맡게 된 것이라고 한다. 통역하는 동안 역사적인 문제나 군사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통역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은 청년이었다.

 

도착시간이 오후 130분이어서 큰 짐은 숙소인 기노완센터로 보내고, 우리는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은 오키나와 소바였는데, 돼지육수에 두툼한 돼지고기와 연골이 푹 삶긴 채 고명으로 나온 독특한 음식이었다. 메밀로 만드는 본토 소바와 달리 밀가루를 두툼하게 삶아낸 굵은 칼국수 같은 식감이었다. 국물은 깊은 맛이었지만, 조금 덜 퍼진 거친 식감이 마누라에게는 좀 별로였던 것 같다. 음식이 짠 편이었는데 오키나와 날씨가 더워서 땀으로 소실되는 나트륨을 보충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짠 맛이 많다고 한다.

 

점심식사 후 버스를 타고 남부전적지로 이동했다. 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가던 19454월부터 6월까지 미군의 군사작전이 전개되었는데, 당시 일본군 사령부가 중부 지방인 나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중부로 상륙했고 일본군은 남쪽으로 퇴각하였기 때문에 주요 전적지가 남부에 거의 분포하고 있었다. 당연히 오키나와 사람들의 희생도 주로 남부에서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안내는 기노완 센터에서 활동하시는 가와카미 요시코 선생님이 맡아주셨다. 헤노코 기지반대 투쟁부터 평화를 위한 활동에 온몸을 던진 참 그리스도인의 인상을 받았다. 부드러운 말소리 속에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분이었다.

 

첫 방문지는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이었다. ‘히메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에는 2개의 여자 고등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교사를 키우는 학교와 흔히 현모양처를 키우는 두 자매학교가 있었고, 일본이 자발적인 지원이라고 미화하고 있지만 강제 징집된 두 학교의 교사를 포함한 학도대 240명 중에 136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났다고 한다. 내부에 전시된 당시 사진을 보면 앳된 얼굴의 소녀들이 참혹한 전쟁에 희생되었다는 가슴 아픈 사실과 본토인들과 다른 외모에서 느낄 수 있는 오키나와의 또 다른 갈등이 느껴진다. 1879년 일본에 강제병합 되기 전까지 류쿠국이라는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는 독자적인 언어와 전통을 가진 본토인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사람들이었다. 마치 탐라국제주를 보는 안타까움이 겹친다.

 

두 번째 방문지는 일본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 중에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의 유골을 모아 합장한 혼백의 탑이었다. 전쟁 후 자신들의 삶을 일구던 땅을 미군기지로 빼앗기고 초토화된 땅을 개간해서 먹고 살아남으려던 오키나와 사람들은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고 한다. 새로 개간하려는 땅에서 인골이 너무나 많이 나와서 도저히 땅을 고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3개월의 짧은 전투동안 미군을 포함한 무려 24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으니 상황은 짐작이 된다. 미군에게 인골제거를 부탁하고, 이때 발견된 인골을 합장한 혼백의 탑은 3단으로 세워져 있다. 본래는 1단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너무나 많은 인골이 나오는 바람에 3단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한다. 혼백의 탑 주위에는 북해도부터 일본 각 지역에서 세운 기념비가 즐비하다. 머나먼 타향에서 죽어간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 위해 각 지역의 시민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제주에는 4.3항쟁으로 희생된 억울한 원혼을 함께 모신 백조일손(百祖一孫)의 묘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묘소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새겨진 탑이 세워져서 억울한 죽음을 항거하고 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한 무고한 살육을 당하고도 계속 탄압을 받아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참담한 마음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오키나와와 제주는 너무도 닮아 있었다.

 

세 번째 방문지는 한국인 위령탑과 평화의 탑이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징병으로 끌려올 때 오키나와에서는 무려 1만 명의 조선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고자 건립된 위령비와 추모공원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풍경이 공존한다. 위령비에 새겨진 이름 대통령 박정희……. 75년에 건립된 위령탑 바로 앞에 세워진 위령비에 바로 10년 전 굴욕적인 대일협상을 조인한 독립군 때려잡던 만주국 군관 출신 박정희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함께 참가한 이대형 선생님의 말이다. “오키나와 전쟁에 희생된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이었다. 참 의미를 기리려면 조선인 위령비라고 하든지, 아니면 남북한 공동명의로 하는 것이 옳다.” 위령비 앞에 놓여 있는 곱게 접힌 종이학은 역설적이게도 조총련 계열의 민족학교 학생들이 만든 것으로 보였다. 오키나와에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 조선인의 후예들은 그 위령비를 중심으로 한 탑은 지금도 조선 땅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한다. 위령비 뒤에는 돌무덤이 있고 그곳에 억울하게 희생되었고, 조선도 일본도 그리고 한국조차 지우려고 하는 역사가 묻혀있었다. 돌무덤 주위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돌로 시민들의 정성이 표현되어 있고 위령비 앞에는 떠나온 고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위령탑 앞마당에는 화살표 모양의 부조가 고향땅을 가리키고 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자료관 넓은 뜰에 새워진 평화의 탑에는 현재까지 확인된 외국인, 일본인, 오키나와 주민, 그리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 벽들이 서있다. 하나의 조선에서 왔으나 남북으로 갈라진 이름들……. 그나마 북한은 공원이 조성되던 1985년을 끝으로 추가된 이름이 없고, 남쪽 정부도 2010년 이후에는 추가된 이름이 없다. 교과서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덮으려는 한국정권과 사죄는커녕 또 다시 전쟁범죄국가를 꿈꾸는 일본정권의 속마음이 빚어낸 역겨운 결과물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눌러온다. 평화의 탑이 세워져 있는 넓은 마당에는 산처럼 생긴 둥근 분수대가 놓여있다. 정중앙의 산처럼 생긴 구조물은 오키나와를 상징하고 주위에 아시아 지도를 배치해 놓았는데, 흘러나오는 물의 파장이 마치 평화의 기운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첫날부터 흐린 하늘처럼 가슴이 어두웠다.

 

2.

18일 둘째 날은 도카시키 섬으로 향했다. 도카시키 섬은 나하항구에서 페리로 1시간, 쾌속선으로 35분 거리에 있는 인구 700명의 작은 섬이라고 한다. 섬의 끝에서 끝까지 자동차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작은 섬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도카시키 섬에서는 미나모토 히로미 선생님이 안내를 맡아주셨다. 미나모토 선생님은 도카시키 섬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고등학교가 있는 오키나와 본섬으로 옮겨오셨다고 한다. 67세의 해맑은 선생님의 이야기는 선생님의 표정만큼 행복하지는 않았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백옥의 탑이었다. 도카시키 섬의 제법 높은 곳에 형성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성지 같은 곳이었다. 탑 뒷면에는 희생된 594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 안에 조선인의 이름은 없었다. 오키나와에 2만 명, 도카시키 섬에만 200명이 강제로 끌려왔건만 그들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짧은 추모의 시간을 가지고 우리는 가슴이 미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집단자결적지(集團自決跡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이정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일제는 다음과 같이 오키나와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만약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눈을 빼고 코를 베고 혀를 뽑은 다음에 죽이고, 여자는 강간한 뒤 죽여 버린다. 그러니 치욕을 당하지 말고 천황의 신민답게 자랑스럽게 웃으면서 죽어라!’ 민방위 같은 조직에게 나눠진 수류탄 2……. 20~30명의 가족이 모여서 둥그렇게 둘러앉고는 수류탄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그렇게 죽어갔다. 죽으면 다행이었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 죽지 못한 이들은 며칠을 고통 속에 신음하며 서서히 처참하게 목숨을 잃어갔다. 수류탄이 없는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지옥이 펼쳐졌다고 한다. 아이들을 죽이면 어머니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남편은 아내를 먼저 죽이고 아이들을 죽였다. 가족 중에 힘에 센 사람이 다른 가족을 죽이는 일을 주로 맡게 되었다고 한다. 오빠는 여동생을 죽이고, 어떤 엄마는 딸을 죽이고. 목을 졸라 죽이고, 낫으로 죽이고, 돌로 쳐서 죽이고…….

 

도카시키 섬에 상륙한 미군은 곳곳에서 폭발음을 들었고, 밤새 산속에서는 공포에 질린 비명과 울음소리,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날이 밝은 뒤 미군은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붉은 물줄기를 따로 산등성으로 올라가다가 이곳을 발견했다고 한다. 315명이 이렇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이 작은 섬에서만 일어난 비극이 이러하니 오키나와 전체의 참상은 짐작하기조차 싫었다. 미나모토 선생님은 버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군대는 우리를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군대가 결코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오키나와 사람들이 미군기지 이전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행동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도카시키 항구에서 걸어서 수 분 거리에 빨간 기와집이라고 불리던 건물의 터가 남아있다. 이곳은 6명의 다른 조선 여성과 함께 위안부로 고초를 겪었던 고 배봉기 할머니가 생활했던 일제의 위안소가 있던 자리였다. 고 배봉기 할머니는 최초로 일제 군위안부 문제를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보다 16년 전인 1975년에 군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알린 분이다. 그러나 그 사연 또한 기구하다.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 기지가 들어선 오키나와에서 배 할머니는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생활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1972년 오키나와가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소위 호적정리와 같은 일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할머니는 일본어도 한국어도 모르는 상태였고, 3년 기한의 행정조치가 끝날 즈음에 추방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전쟁 성노예였음을 밝혀야 했던 배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드리겠다는 제안을 듣고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가슴에 남은 상처와 치욕은 결국 할머니를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붙잡고 말았다. 오키나와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친 할머니의 유골만이 고향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믿었던 조국에게도, 인간 이하의 처참함을 안겨준 일본에게서도 잊혀져버린 한 생명이 이 섬의 바람과 비가 되지는 않았을까?

 

지금 나는 어느 곳에서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자기 자신을 찾으러 아버님의 나라 어머님의 고향을 찾아가노라

한줄기 원한의 길을

한줄기 원한의 그 길을 더듬어 가면 고인들의 통곡소리 들려오나니

어른들이여 굴욕에 빠진 아낙네들이여

나는 방금 그대들의 원한의 품속에서 태어났노라

그대들이자 바로 나 자신이로다

그대들은 우리들 품속에서 다시 소생하리라

모두의 영원한 새로운 생을 영위하리로다

 

배봉기 할머니의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도카시키 섬 작은 언덕에는 일제의 만행으로 희생된 조선인들과 군위안부를 추모하는 아리랑비가 세워졌다. 작은 공원처럼 만들어진 아리랑비에는 환생(還生)이라는 글자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고, 주위의 구조물들에는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생명의 상징들로 장식이 되어있다. 아리랑비는 역시 떠나온 고향 조선 땅을 향해 서있다.

 

3.

희생자의 눈물처럼 비가 흩뿌리던 날씨는 푸른 하늘로 바뀌었다. 도카시키 섬을 떠난 우리가 향한 곳은 미군기지 건설 저지행동 텐트가 있는 헤노코였다. 헤노코에는 이미 미군의 기지가 있다. 그런데 나하 시내를 점령하고 있는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로 옮기면서 대대적인 확대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헤노코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세계적으로 보호받는 듀공이 서식하는 천혜의 자연이 기지건설로 파괴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어민들의 생계는 위협받고 파괴된 자연으로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대규모 군사기지가 건설된다면 동북아의 전쟁위기는 한층 증가할 것이 뻔한 일이다. 제주 강정해군기지가 당연히 겹쳐졌다. 제주와 오키나와 그리고 괌을 연결하는 미국의 동북 방어 전략에 희생될 사람들은 자국에서조차 소외되고 차별받는 현지인들이다. 기지와 활주로 건설을 위한 매립비용만 25천억 원이 소요되고 전체 사업비가 8조원에 육박하는 이 전쟁사업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일본이 지불한다. 국민의 안전과 복지에 사용되어야 할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수 지배권력과 이익집단의 사욕을 위해 사용되면서, 희생은 엉뚱하게 오키나와 시민이 당하는 것이다. 일본 본토에 의한 오키나와의 차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키나와 기독교계의 대표는 오키나와인이 될 수 없고 본토인에게만 자격이 주어진다고 한다. 종교계가 이 정도이니 다른 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일본인구의 1%, 국토의 0.6%를 차지하는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기지의 74%가 몰려있다는 사실은 오늘 오키나와의 현실을 숨길 수 없이 보여준다. 설명을 듣고 있던 우리 곁으로 가와카미 선생님이 해상시위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지나가셨다. 기노안에서 일부러 헤노코까지 와서 평화할동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수줍은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하는 선생님의 화장기 없는 까만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하로 돌아오는 길에 길게 늘어선 천막과 기지건설 현장의 정문에 모여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헤노코 주민들을 보면서 강정에서 몸을 던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일찌감치 은퇴를 결정하고 최근 제주에 정착한 한 선배가 보고 싶어졌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모두의 평화인데 이들 소수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싸우고, 우리는 그 열매만 귀한 줄도 모르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탐하고 있으니....... 차창으로 지나가면서 얼굴만 마주친 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더니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던지....... 그만큼 힘들고 외롭다는 뜻일 것이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꼭 내려서 저들과 함께 도시락을 나눠먹고 잠시라도 같이 앉아있고 싶었다.

 

4.

일요일인 오늘은 수리교회 예배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함께 할 특송을 준비하는 시간이 있었다. 어제의 성찬을 거하게 한 관계로 연습에는 참여하지 못한 나에게 마누라가 이야기를 전해줬다. 연습하는 노래를 듣고 있던 가와카미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거려서 노래의 뜻을 통역해 드렸더니 더 눈물을 보였다는 것이다. ‘평화가 있기를노래의 제목이다. 나는 원래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노래 자체는 의미가 깊은 아름다운 곡이지만, 원곡의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마치 가수가 절대자인양 우리에게 평화를 던져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별로 듣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가수가 아닌 평범한 이들이 마음을 모아 부르는 노래는 너무나도 다른 힘이 있는 듯하다. 사실 혼자서는 이 노래를 끝까지 잘 부르지 못한다. 목이 메어오기 때문이다. 가와카미 선생님도 나와 같은 느낌이었을까?

 

가사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끝 날까지 내 평화가 함께 할 것이니나는 이 구절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지막 그날까지도 내가 함께 할 것이니까. 생명의 피를 빨아먹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내가 목숨을 다하여 지키고 나누고자 한 그 평화가 함께 할 것이니까.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음의 권세조차도. 내가 곁에 있으니까.......’ 예배 시간 특송을 합창하는 동안 나는 입만 벙긋거리며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눈만 껌벅이며 어떻게든 눈물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가와카미 선생님이라면 나를 이해해 주실 것 같다.

 

수리교회는 전쟁으로 초토화된 오키나와에서 십자가과 건물 벽만 일부가 남아서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비록 교인이 아니더라도 교회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 집이 어디쯤이었지 하면서 길을 찾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예배당에는 당시에 남아있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전쟁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십자가는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예배는 어린이부터 나이와 상관없이 함께 참여했는데, 초반 20분 정도를 아이들을 위해 먼저 할애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예배당 앞으로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목사님이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좋아보였다. 예배 후에 교인들과 함께 점심을 나누면서 따듯한 배려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고, 이후에 다녀온 수리성에서 본 일본군 기지는 전쟁의 상처가 결코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마지막 날, 공항으로 향하던 길에 들른 사키마 미술관은 마지막까지 오키나와와 평화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처음 일정을 받았을 때 왜 미술관이 들어있는지 이해가 바로 되지는 않았다. 비행기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까 일부러 잠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지 않을까 막연하게 짐작만 했었다. 그러나 사키마 미술관에서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얻어맞게 되었다.

 

어머니의 배를 형상화해서 만들어진 전통 무덤인 가메코바카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전쟁 때는 이곳을 피신처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미술관 옥상의 계단은 위령의 날인 623일 오후 7시 태양이 동쪽과 서쪽의 창문에 일직선으로 놓이게 만들어졌다. 작은 부분에서조차 세심한 배려와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한 미술관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옥상에서 본 후텐마 미군기지는 너무나 넓었다. 도시 한 가운데에 턱하니 자리 잡은 미군기지는 갑갑함을 넘어 목이 조여 오는 것처럼 숨이 차게 만들었다. 소나무 가로수가 수리성까지 이어지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주인행세를 하는 전쟁기지는 죽음의 땅이었다. 오키나와가 결코 원하지 않는.

 

미술관 안의 그림은 보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죽음의 지옥으로 내몰린 오키나와의 그 날을 표현한 그림은 모두가 침묵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림의 한 부분에는 희생된 조선인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가게를 가질 형편이 되질 못했던 조선인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에서 물건을 팔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일본군을 그 사내를 미군 간첩으로 몰아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조차. 그것도 전쟁이 이미 끝난 19458월 이후에. 전쟁이 끝난 지도 모르고 오키나와는 그렇게 죽음의 지옥에서 한참을 헤맸던 것이다.

 

0.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글은 일상을 핑계로 뒤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베트남을 다녀왔을 때 글을 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던 것처럼 시키지도 않는 숙제를 혼자서 꾸역꾸역 하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베트남에서 일어났던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한국군의 범죄처럼. 생명을 빼앗고 평화를 파괴하는 어떠한 일이든 잊어버려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이 지옥을 이겨내고 생명을 이어가는 사람들과 자연을 기억하기 위해서. 평화는 우리 곁에 있을 때 목숨을 다해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사람도 음식도 자연도 너무나 정겹고 따듯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길목협동조합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며칠 전 평화기행을 정리한 선물을 받았을 때 그 감동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단체를 운영하고 실무를 책임진다면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움과 반성이 크게 밀려왔다. 한번 일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히 평화기행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도임방주 간사께 깊은 고마움을 보낸다. 열정을 가지고 통역을 맡아준 김연실 씨도 건강하게 잘 지내길, 소소한 행복이 많이 생기길 기원해 본다. 기회가 된다면 가까운 이들과 함께 꼭 다시 한 번 오키나와에, 기노완센터에 가고 싶다. 준비할 능력은 없으니까 길목협동조합의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뻔뻔함을 무릅쓰고라도.

 

돌아오는 길에 마누라가 이야기했다. “일본을 열 번도 넘게 다녀왔는데, 이제 좀 정이 가기 시작하네.” 나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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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2016오키나와 1946年撮影 学芸会 / 1946년 촬영 학예회 file 도임방주 2016.02.03 21668
138 2016오키나와 1946年撮影 ひめゆりの塔 / 1946년 촬영한 히메유리의 탑 file 도임방주 2016.02.03 21710
137 2016오키나와 5년에 한번! 전세계 오키나와 사람들이 모이는 날이 올해 2016년 10월26일부터 5일간 열립니다^ file 도임방주 2016.02.03 25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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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2016베트남 <미리가보는베트남평화기행> 연속 문자 모음 1-50 도임방주 2015.11.08 26311
59 2016베트남 2016년 베트남 평화기행 기획서 file 도임방주 2015.11.07 26633
58 2016오키나와 <미리보는 오키나와> 연속 알림 문자 모음 / 2015년 10월 30일부터 도임방주 2015.11.04 31620
57 2016오키나와 <오키나와 다큐> 남국의 태양, 오키나와 - EBS 다큐 도임방주 2015.10.30 25753
56 2016오키나와 <미리만나는오키나와-1> 보아의 목소리로 듣는 오키나와 노래 나다 소소 - 20151031 도임방주 2015.10.30 25442
55 2016오키나와 2016 오키나와 평화기행 file 관리자 2015.10.09 3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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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2016오키나와 <오키나와 평화 3> 아시아 리포트 - 오키나와에 부는 평화의 바람 도임방주 2015.04.23 26777
52 2016오키나와 <오키나와 평화 2> 오키나와 아이들이 그린 평화 메시지 file 도임방주 2015.04.23 27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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