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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 환

(월간 ‘말’지 전문기자 겸 기획위원)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과거와 현재

정 지 환

(월간 ‘말’지 전문기자 겸 기획위원)

1. 프롤로그 : 칼-마이던스 기자의 5가지 시각

2. 여순사건 전후 한국언론의 상황과 논리

3.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과거

4.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현재

5. 에필로그 : 냉전에서 화해로 가는 길목의 3가지 삽화

1. 프롤로그 : 칼-마이던스 기자의 5가지 시각

1948년 12월 6일자 <라이프>지에는 「한국에서의 반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해 10월 19일 밤 한반도 남단에서 발생해 일주일 동안 지속된 ‘비극적 사건’에 대한 한 외신기자의 현지 보도였다. 필자는 기사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눈 뒤 번호를 붙여 보았다.

(1) 아직 미군복 차림이던 반군들과 그 추종자들은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깃발을 올렸고, 피로 물들었던 수일 동안 리승만 정부의 남한 일부 지역을 통치했다. 반군들이 산야로 잠입하기 전, 적어도 일시적으로 정부군에 퇴각하기 전까지, 라이프지의 칼-마이던스 기자는 이 야만적인 결과를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있었다.


‘평화스런 천국’(peaceful heaven)을 의미하는 순천(順天)에서, 반군 지도자들은 시 교도소 문을 열고 정치범들로 하여금 보복 상대를 색출하도록 하기 위해, 시 전역에 걸쳐 집집마다 자신들을 안내하도록 했다. 이 같은 도움으로, 반군들은 정부군이 10월 23일 순천을 탈환할 때까지 500명의 시민과 100명의 경찰들을 살육했다.


(2)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군의 차례였다. 라이프지의 칼-마이던스는 (정부군의) 보복이 시작됐을 때, 공포 속에서 이를 지켜봤다. 그는 타전(打電)했다. “이제 정부군은, 산야로 도망갔다 돌아온 몇몇 경찰의 도움을 받아, (반군의) 잔혹성을 다시 잔혹하게 보복하고 있다.


우리가 순천에서 아녀자들과 함께 큰 운동장의 측선(側線)에서 지켜보는 동안, 그들의 남편과 아들들은 (정부에 대한) 충성도를 검열받고 있었다. 셔츠가 벗겨진 4명의 젊은이는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기도하는 형상으로 자신의 두 손을 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애원하던 그 두 손이 그의 입과 코로 들어간 것은 (정부군의) 권총 손잡이가 그의 이빨들을 후려쳤을 때였다.”


(3) 순천이 피로 물든 처음 며칠의 공포 시기엔, 그 어떠한 관계자들도 감히 관련 사체를 요구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자와 죽은 자 간의 신원확인을 통해, 공산주의자나 정부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즉각적인 보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안전하게 되었을 때, 여자들은 (퉁퉁) 부어오른 시체더미에서 관련 사체를 찾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큰 운동장을 돌아다녔는데, 이는 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관련 사체를 찾았을 때, 처음에는 망연자실했다가 나중에는 통곡 속에 광란했다.


우리는 이 세 부분의 글에 각각 (1) 반란군의 봉기와 살육 (2) 정부군의 잔혹한 보복 (3) 민중의 눈물과 통곡이라는 제목을 붙여볼 수 있거니와, 그것은 1907년 보스턴에서 태어난 이 미국인 종군기자 칼-마이던스라는 제3자의 눈에 비쳐진 여순사건의 ‘객관적 인상’이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칼-마이던스가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간 뒤 <눈에 비치는 그 이상의 것(More than meets the eye)>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쓰면서 여순사건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는 점이다.


(4) 이 반란은 반도의 최남단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군 연대안의 소수 공산당 세포가 야음을 틈타 그들의 장교를 살해하고 장기간에 걸쳐 인민을 계속 학대해 온 정치가와 경찰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자 시민이 폭동에 가담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한편 칼-마이던스는 이 책을 통해 여순사건의 악몽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가장 무섭고 두려운 장면’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5) 그리고 나서 4일 후 3명의 기자와 함께 내가 시내에 들어갔을 때 전 시민이 학교 운동장에 모아져 앉혀져 있었다. 이곳에서 폭동을 진압했던 정부의 군대가 반란자들의 잔학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그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무섭고 두려운 징벌의 장면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고 있는 아녀자들의 숨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나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그들의 얼굴 피부가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 표정-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마디의 항변도 없었다.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도 없고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비는 어떤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울 수조차 있었겠는가.


다소 긴 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칼-마이던스가 말하고자 했던 ‘눈에 비치는 그 이상의 것’이 결국 ‘폭력에 의한 인간성 파괴에 대한 환기와 경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한국 언론에선 여순사건에 대한 이런 ‘다양한 시각’과 ‘본질적 통찰’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칼-마이던스의 시각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언론은 여전히 (1) 반란군의 봉기와 살육만을 부각시켜 왔을 뿐 (2) 정부군의 잔혹한 보복과 (3) 민중의 눈물과 통곡에 대해선 애써 외면해온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순사건의 (4) 원인과 (5) 본질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아예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한국언론의 주류를 자처하는 대다수 매체조차 여순사건에 관한 한 단세포적 인식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제라도 한국언론은 좌우대립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 ‘항변 없는 침묵’ 속에 죽어가야만 했던 민초들의 역사를 향한 ‘소리 없는 호소’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2. 여순사건 전후 한국언론의 상황과 논리

여순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 일변도의 인식의 1차적 근거는 언론보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언론보도에 대한 고찰은 여순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한 ‘첫 단추 바로 끼우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실제로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는 주로 언론을 통하여 국민에게 전달됐다. 하지만 정부발표와 언론보도 중에는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 상당히 많으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홍영기, 「여순사건에 관한 자료의 성격과 연구 현황」, 163p)

여순사건에 대한 한국언론의 보도행태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우선 1948년 정부 출범 당시 언론활동을 규정하고 제한했던 외부적․제도적 상황에 대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1948년 당시 언론계에 철저하게 관철됐던 정부 당국의 언론검열 조치를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정부 당국은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언론에 대한 7개 조항 지침을 제정하였다. 이 7개 조항 지침은 대한민국의 국시와 정부시책을 위반하는 기사,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공산당과 이북 북괴정권을 인정하거나 비호하는 기사, 허위의 사실을 날조하여 선동하는 기사,


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하고 국위를 손상시키는 기사, 자극적인 논조나 보도로써 민심을 소란시키는 기사,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등의 게재를 금지시킨다는 내용이었다.(강준만, <권력변환>, 326-327p) 분단 대치와 좌우대립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다고 해도 이러한 ‘보도지침’은 언제든지 언론보도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통제수단으로 표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전남 일원에는 계엄령까지 발포된 상황이었다.


아울러 여순사건 초기에 정부는 철저한 보도관제를 시행했다. 실제로 여순사건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3일이나 지난 뒤인 10월 22일부터였다. 한편 이 과정에서 기자들이 힘겹게 현장을 취재하고도 사진이나 기사 등을 압수 당한 사례도 발생했다.


“27 일까지는 비교적 순조롭게 촬영을 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사진과 원고를 군에서 검열 당해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과 더욱 더 걱정되는 것은 여수에서 광주 본사까지 원고를 보내려면 결사대를 조직하여 송고해야만 됐으니 이 일은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한번 죽지 두 번 죽나’하는 결의를 다지고 가까스로 순천까지는 29일에 도착하였으나 광주까지 가는 일이 또 다시 문제였다. 교통이 완전 차단되었던 것이다. 몇 번의 검문을 거쳐 31일 밤에 가까스로 광주에 도착했으나 찍은 사진 대부분을 검열에 걸려 빼앗기고 말았다. 나로서는 생명을 걸고 찍은 사진들이며 순천에서 광주까지 입산한 반군들의 기습을 받으며 사선을 돌파하여 가져온 사진들인데 아쉽기 한이 없었다.”(이경모, 「사선 넘으며 촬영한 동족상잔의 비극」, 52p)


그러나 여순사건에 대한 왜곡보도를 단순히 언론의 외부적․제도적 문제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언론의 사명은 끈질긴 확인취재와 냉철한 비교분석을 통해 객관적 사실과 사회적 본질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여순사건 당시 대다수 한국언론은 그러한 언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채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여순사건에 대한 보도행태를 언론의 내부적․주체적 상황에서 동시에 고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거니와,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적절하고 타당하다.


지 금까지도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순사건 인식은 당시 정부가 왜곡해서 발표한 내용 -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흉악한 처단, 소요와 혼란을 부추기는 좌익활동, 진압군인에 대항한 학생들의 극렬한 저항, 이에 대한 정부나 진압군의 정당한 응징조치 등 - 과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많은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희생시킨 여순진압작전의 실상이나 불법적인 계엄령 그리고 양민학살의 실상 등 여순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측면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역사연구>, 153p)


우선 당시 언론은 여순사건의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원인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수행해야 했다. 설사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1) 왜 다수의 군인들이 소수의 남로당 계열 군인들의 선동에 넘어갔는지, (2) 왜 다수의 지방 주민들이 이들의 반란에 가세했는지, (3) 왜 일부 진압부대 군인들이 도리어 반란군에 합류했는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도 그런 ‘상식적 의문’을 제기한 기자가 있었다.


이 사건의 현지로 가면서 우리가 먼저 알고자 한 것이 왜 제14연대라는 적지 않은 국군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키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서울서 우리가 들은 한 공산당원과 극우파의 공동전략으로 일으킨 것이라는 것이었으나 만일 이 단순한 해석을 그대로 믿는다면 반란의 가능성은 비단 제14연대 뿐은 아니라는 결과이 버려지는 것이며 따라서 금반 사건은 좀더 상세한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다.(설국환, 「반란지구 답사기」, <신천지>, 1948년 11월호)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당시 대다수 한국언론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좀더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자와 국민이 여순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앞에서 칼-마이던스의 분석을 살펴보았거니와, 14연대 반란의 원인과 배경은 다음과 같은 진술과 무관치 않다.


여 순사건은 봉기를 일으킨 주체세력인 군과 경쟁관계에 있던 경찰과의 갈등도 작용했지만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발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분단정권 반대, 친일파 척결 등 해방 후부터 쌓인 여러 불만이 폭발된 것이었다.(김득중, 앞의 글, 150p)


우리는 여기서 군인과 경찰의 대립, 친일파 척결의 미흡 등이 여순반란의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두 개의 인용문으로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1948년 10월 23일 서울발 광주행 열차에서 국방부 인사국장 강영훈 중령이 합동통신 설국환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을 들어보자.


사 회경제의 혼란에서 오는 일부 행정관리 내지는 경찰의 부패를 곁에 보면서 국군병사들은 완전히 목표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군의 고민은 경찰 측에서 왕왕 말하듯 하는 국군의 불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입의 부족을 비행으로써 보충하는 많은 경관은 다만 묵묵히 어느 날만을 기하고 있는 국군병사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대한 국군병사의 반경(反警)감정은 결코 상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공산당의 모략으로 발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제주상태만 하더라도 진압이 어려운 것은 경찰의 비행 때문입니다.


강영훈 중령의 발언에서, 당시 경찰이 부패와 비행을 저지르면서도 도리어 국군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에 대한 군인들의 반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조선일보 70년사>에 기술된 여순사건 관련내용을 읽어보자.

1948 년 9월 22일, 일제시대에 일본에 협력하여 악질적으로 민족배반행위를 하였던 친일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 공포되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특별검찰위원회․특별재판위원회가 설치된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에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는 충격적 사태가 터진다.(<조선일보70년사> 2권, 113p)


이 글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라는 대목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의 비협조 때문에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도 여순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언론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시 언론이 여순사건을 좀더 객관적으로 다룰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에 소개하는 인용문이 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1947 년 말에 이르러서는 좌익계 신문들은 명맥만을 유지한 채 거의 사라졌지만, 미국이 한국문제를 UN에 단독으로 상정하여 점차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면서 좌익계 신문은 물론 대부분의 중도계 신문들과 일부의 우익계 신문들까지도 이에 반대하는 논조를 보임으로써, 점차 단독정부를 지지하는 일부 신문․언론인들과 자주적 통일국가를 염원하는 신문․언론인들간 사이의 대립이 첨예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문들 사이의 대립은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남북협상을 계기로, 이를 지지하는 신문․언론인과 이를 반대하는 신문․언론인으로 명확히 드러났다. 그러나 남북협상이 무위로 돌아가고 남한만의 총선을 통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자주적 통일국가를 염원하던 대부분의 신문들은 폐간되었고 일부 신문들은 살아남기 위해 급격히 논조를 변화시키게 되었다.(박용규, 「미군정기 중간파 언론: 설의식의 <새한민보>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와 언론2>, 173p)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5년 해방 직후에만 하더라도 다수파를 형성하던 좌익계 신문은 1948년 정부수립 당시에는 거의 소멸되는 운명을 맞는다. 이러한 언론의 불균형 현상은 당시 민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미군정 공보부가 1946년 7월에 실시한 대규모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70%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상으로 ‘사회주의’(참고로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를 꼽았으며 85%가 ‘대의기구를 통한 모든 인민의 지배’가 바람직한 정부형태라고 응답했다.

따라서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언론을 갖지 못한 민중은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라도 폭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었으며, 또한 대다수 한국언론은 언제라도 민중을 배반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3.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과거

여순사건이 터지자 한국언론은 이승만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검증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철저히 이용당한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숱한 오보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주체세력 조작을 통해 이 사건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화위복(?)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1948년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과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최대의 정적이었던 김구를 견제하려 했으며, 나중에는 반란의 실질적 주체가 14연대 장병들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조직된 민간 좌익이라고 몰아감으로써 예상치 못한 주민들의 대규모 반란 동참에 따른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난과 진압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1) 여순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도 공개하지 않고 있던 정부는 이틀이 지난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 국무총리의 발표를 통해 처음으로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범석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다음은 이 발표에 대한 두 신문의 보도이다.


이 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소령으로 진급하여 여수 연대장으로 가게 되었으며 방금 신문 중에 있는 오동기라는 자로 이자는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해서 젊은 하사관의 단순한 심리를 선동하고 일방으로 극우진영의 국외 외국내의 실의 정객들과 간접 연락을 취하여 로서아 10월혁명과 비슷한 전국적인 반란을 기도했던 것이다.(서울신문 1948. 10. 22)


천 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 인류의 자유평화를 파괴하고 폭동으로서 정치적 기도를 달성하려는 세력이 성공되는 법이 없다. 이 죄상이 앞으로 전부 폭로되는 날 대중은 더욱 분개할 것이며 정부는 이와 같은 죄상 폭동을 용인하지 않는다.(자유신문 1948. 10. 22)


이범석 국무총리는 다음날인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도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서울신문 1948. 10. 24)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혁명의용군사건’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섰다. 한편 거의 모든 언론이 이 두 발표를 천편일률적으로 대서특필했는데,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은 그 주모자 최능진, 오동기, 서세중, 김진섭 등이 남노당과 결탁하여 무력혁명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김일성 일파와 합작하여 자기들 몇 사람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려고 공모”했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여기서 잠깐 새롭게 혁명의용군사건의 주모자로 떠오른 최능진이란 인물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최능진은 수사 당국에 의해 ‘유엔감시 하의 남한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남북협상이 실패한 후에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방경비대를 이용하여 무력혁명을 감행하려 한 인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북협상에 나서려는 김구․김규식을 남한 우익진영이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비난했음에도 이에 대항하지 못하는 남한 청년들은 다 썩었다고 분개한 민족주의자에 불과했다.


(연합신문 1949. 2. 9) 결국 1948년 제헌의회선거 당시 동대문 갑구에 출마하여 감히 ‘국부 이승만’과 겨루었던 최능진을 한번 손봐주려 했던 수사는 선거운동원으로 참가했던 군인을 신원보증했던 오동기로 이어졌고, 여순사건이 오동기가 근무했던 14연대에서 일어나게 되자 최능진에게 무력혁명의 죄까지 뒤집어씌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승만 정부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연막을 피우며 ‘극우의 정객’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 ‘음모정치가’ ‘혁명의용군 주모자가 숭배하는 정객’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과연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물론 그 인물은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구였다. 이승만 정부는 최능진이 주장했던 단독정부 수립반대, 남북협상 등의 정치적 입장이 김구와 한독당의 노선과 상당한 친화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용군사건’은 나중에 조작된 사건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당장 재판과정에서 무력공산혁명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으며(유건호, 「여순반란사건」, <전환기의 내막>, 163~164p), 국방부도 오동기가 ‘무고하게 역적의 죄인’이 되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국방부 기록에 따르면, 오동기가 생면부지인 최능진과 결탁하고 14연대의 김지회와 반란을 음모하기에는 14연대장 시절부터 한국전쟁 동안 일체 좌익에 협력하지 않는 등 행동거지가 너무나 명백했다고 한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1: 해방과 건군>, 488p)


이 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활용하여 우익 지배층 내부를 재편하고 이승만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지형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밑으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일부 우익세력에 의한 쿠데타적 행동으로 국민에게 광고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을 재편하는데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정적을 압살하려던 이승만 정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김득중, 앞의 책, 165p)


이승만 정부가 ‘오동기 → 최능진 → 김구’라는 허구적 삼단논법을 통해 여순반란의 주체를 조작하려던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대다수 한국언론은 이승만 정부의 충직한 나팔수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과오는 여순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이나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은 채 반복되었다.


(2) 이승만 정부는 ‘우익과 공산주의자 연합에 의한 반란’이라는 기존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는 데다 여순사건이 장기화되자 반란의 주체세력을 이번에는 ‘민간인 공산주의자’로 몰아나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간인 주동설’을 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형원 공보처차장이 총대를 멨다.


그는 일반 국민들이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중이 여기에 호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그들이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서울신문 1948. 10. 29) 다시 말해 반란의 주체는 14연대 장병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조직된 민간 좌익들이라는 것이 발표의 요지였다. 그렇다면 정부의 입장이 이렇게 갑자기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공 보처장의 발표는 정부 조직의 한 부분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이 발표는 우익과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으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정부의 초기 발표를 사실상 수정하고 사건의 주체를 민간인 공산주의자로, 14연대 군인은 이에 종속되는 지위로 파악한 것이었다.(김득중, 앞의 책, 167p)

정부가 이 사건을 민간인 공산주의자 주동의 폭동으로 명백히 규정하면서 필연적으로 그 파장은 북한 공산주의세력으로까지 번져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국방부는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진압을 완료한 이후인 11월 3일 ‘전국 동포에게 고함’이란 벽보를 전국에 살포했는데, 여기에는 “민족적 양심을 몰각한 공산도당의 조직과 명령을 통하여…대한민국 정부를 파괴”, “소련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정권의 음모”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평화일보 1948. 11) 이에 대한 김득중의 발언은 시사적이다.

여 순사건의 주체에 대한 규정은 이런 식으로 냉전적 설정으로 이동했다. 실제 사실이 어떠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런 사실을 확인할 여유나 의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뒤바뀜을 통해 내부 갈등의 책임을 밖의 확인되지 않은 실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지배층의 실정을 은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사건이 기본적으로 내부갈등 때문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사주로 몰아감으로써 사건 주체의 정당성을 박탈해버리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김득중, 앞의 책, 169p)


여순사건의 주체세력을 ‘확인되지 않은 외부’로 설정할 경우, 더욱이 그것이 북한 공산주의세력으로 상정될 경우, 현지 주민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대응정책이 전개되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4일의 담화에서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표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른바 ‘민간인 주동설’과 ‘북한 사주설’은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진압작전과 곧이어 벌어진 협력자 색출과정에서 현지 주민들에 대해 가해진 엄청난 희생을 정당화시켜준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일제시대의 만주토벌을 연상케 한 초토화 작전과 협력자 색출은 14연대가 점령했을 때보다 더 큰 인적․물적 피해를 남겼다.


사실 진압이 시작되기 전 14연대 주력부대는 모두 여수와 순천을 빠져나갔으며 소수의 군인과 이 지역 좌익활동가들 그리고 분위기에 편승에 합류한 청년들만이 남아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진압군의 작전은 전 시민을 반란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삼는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수없이 죽어갔음은 물론이다.(김득중, 「여순사건 당시의 민간인 학살」,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304p)


(3)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가는 1948년 순천 갑구 국회의원 황두연, 순천지청 검사 박찬길, 여수여중 교장 송욱 등 사회지도급 인사들마저 반란의 ‘수괴’로 몰리어 총살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렸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된다.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 검사였던 박찬길 검사는 순천이 진압된 직후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엄격한 법의 기준에 따라 사건을 처리해서 올곧은 판사로 이름이 나 있던 그의 죄목은 반란군에 협조하여 인민재판에서 재판장을 담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나중에 국회에서 근거 없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박찬길 검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된 까닭은 사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현지 경찰 등이 올린 조작된 정보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폭로하거나 막지 못했다. 도리어 언론은 국회의원까지 순식간에 ‘빨갱이’와 ‘반도’로 만들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당시 대표적인 극우언론 평화일보가 그 악역을 담당했다.


평화일보는 10월 30일 ‘순천반란지구 인민재판에 국회의원 황두연이 배석 판사로 활약’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현역 국회의원이 인민재판에 판사로 참가했다는 보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런 기사와 소문은 전후 사실에 대한 확인이 없이 조작된 기사였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김효석 내무부장관은 국회에서 황 의원이 인민재판에 배석했다는 점은 허위라고 인정했지만, 이 오보로 황 의원은 진압 직후 다짜고짜 특별조사국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고 취조를 받아야만 했다. 김득중은 당시의 국회속기록을 인용하여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황 의원이 인민재판에 참가했다는 평화일보 10월 30일자 기사는 이미 3일 전인 27일 순천에서 이지웅 기자가 보낸 것이었다. 양우정 사장은 “이런 악질행동을 한 자를 숙청하는 의미”로 대대적으로 보도하라고 지시했으나 황 의원의 아들 황현수가 회사를 직접 방문하여 사건을 부인했고, 국회 출입기자도 사실이 아니라고 하여 게재가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29일 중앙청 출입기자와 양우정 사장은 사실임이 틀림없다고 다시 주장하였고 사장은 황 의원에 대한 기사를 실을 것을 지시했다. 이와 같은 신문게재 경위는 배후에 깔린 정치적 목적을 의심하게 하였다. 더욱이 이 기사를 송고했던 이지웅 기자는 인민재판에서 석방된 어떤 시민한테서 황 의원 혐의사실을 들었을 뿐이고 다른 확인절차를 취했던 것도 아니었다.(김득중, 앞의 글, 318p)


참고로 이 사실을 처음 보도한 평화일보 양우정 사장은 이승만과 가까운 인사였다. 놀라운 것은 황 의원의 누명이 벗겨진 후에도 평화일보가 악의적 보도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수여중 송욱 교장은 사건 초기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갑자기 반란의 총지휘자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여학교 교장이 반란의 수괴라는 내용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도리어 이 점이 세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정부의 강경한 진압을 부추겼다.


송욱 교장이 여순사건의 민간인 수괴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정일권 육군총참모부장의 10월 26일 발표를 통해서였다. 당시 국제신문, 조선일보, 세계일보, 민주일보, 동광신문 등 대다수 신문이 이 사실을 보도했으며, 이 사실은 지금도 국방부의 <한국전쟁사>에 ‘정사’로 기술돼 있다.


그러나 최근 그것은 잘못된 보도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송욱 교장은 좌익이 아니라 양심적 우익인사라는 것이다. 송 교장이 어떤 사람인가는 살벌한 계엄령하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취조를 받기 위해 군기대로 넘어갔을 때 여수의 각 학교와 학생단체에서 그의 석방을 탄원하는 진정서를 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던 우익인사였던 송욱 교장이 반란군 수괴로 잘못 알려진 것은 봉기군이 그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강제로 인민대회 연사 명단에 이름을 집어넣은 사실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일보 1948년 11월 2일자 기사를 보더라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5명’의 의장단을 선출했다고 보도하고도 정작 의장단 명단에는 송욱을 포함해 ‘6명’의 이름을 소개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계엄 당국이 송욱 교장을 봉기군의 수괴로 만들기 위해 그의 이름을 사후에 추가한 뒤 기자들에게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보가 나왔을까. 반충남은 “신문 보도의 ‘수수께끼’ 역시 서슬이 시퍼런 군 당국을 의식한 기자가 간접적으로 ‘송욱 교장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려고 노력한 흔적으로 여겨진다”고 분석했다.(반충남, 「여수 14연대 반란과 송욱 교장」, 월간 <말> 93년 6월호, 226~227p)


한편 정부와 군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오보도 속출했다. 대표적인 오보는 10월 24일 여수를 완전 탈환했다는 보도(조선일보, 동아일보, 동광신문, 호남신문 등 주요 일간지)와 14연대 반란군을 이끌었던 소대장 김지회를 전격 체포했다는 보도(동광신문)이다. 여수를 완전히 탈환한 것은 10월 27일이었다. 특히 군 당국이 한 지방지 기자에게 김지회를 체포했다고 제보함으로써 그 기사가 국내외에 전송됐다가 곧 바로 낭설이라고 정정하는 촌극을 빚었다.


(4) 여기서 반드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학생들의 봉기참여에 대한 정부 당국의 발표와 언론의 보도태도이다. 언론은 “홍안의 여학생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죽창 혹은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무려 남녀학생의 80%가 반란군에 가담해 싸웠다는 설이 유포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정부보다 한술 더 떠 윤색과 작문까지 시도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화의 창조(?)에는 특히 동아일보와 소설가 박종화의 역할이 컸는데, 박종화는 한 지방신문에 실린 기사를 윤색해 전혀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다. 그가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원작’은 동광신문 1948년 11월 2일자에 실린 기사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관 군이 여수시가에 돌입하였을 때 조그마한 여학생 하나가 “아저씨!”하고 뛰어나와서 한 병사한테 달려들었는데 그 병사는 인민군에 납치되어 있던 여학생인줄 알고 “걱정 마라! 적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 하고 외치자마자 스카트 밑에 감추었던 권총을 쏘아서 그 병사를 죽인 예가 있다.


당시에 떠돌던 소문을 전한 이 짧은 기사를 박종화는 소설가 특유의 문체로 정리해 동아일보 1948년 11월 21일자에 실었다. 「박종화 남행록(완)」이라는 제목의 이 글을 보자.


작 전참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 사상이 한번 머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사람이 지독하게 되는 것을 아십니까? 여수 진주에서 생긴 일인데 여학생들이 카빈총을 치마 속에 감추어 가지고 우리들 국군장교와 병사들을 유도합니다. 오라버니! 하고 재생의 환희에서 부르짖는 듯 우리들을 환영합니다. 무심코 앞에 갔을 때는 벌써 치마 속에서 팽! 소리가 나며 군인들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깜찍한 일을 보십시오.


이것들은 나이 겨우 열여덟, 열아홉 살 되는 것들입니다. …(중략)… 이러한 여중학생 몇 명을 잡아다가 고문을 했습니다. 그 꼴을 보느라고 너는 총살이다 위협했더니 처음엔 부인을 하며 엉엉 울다가 하나, 둘, 셋 하고 구령을 불러서 정말 총살하는 듯한 모양을 보였더니 ‘인민공화국 만세’를 높이 부릅니다.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평시에 학교 교육이 얼마나 민족적인 육성에 등한시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남는 노릇이올시다. 학교에 다닙네 하고 공산주의의 이념만을 머리에 집어넣는 공부를 한 셈이올시다.


이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는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좌익의 부정적 이미지로 일반 국민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압군과 정부,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이 퍼뜨린 여학생 반란가담의 진상은 1949년 봄 여수군 장학사 오길언이 여수여중에서 열린 여수지역 교원세미나에서 발표한 ‘반란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에 의해 당장 바로잡힌 바 있다.


오 장학사는 항간에서 떠돌고 있는 이 소문이 사실무근한 낭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교부의 지시를 받고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재를 확인해 보았는데, 조사한 결과 여학생 가운데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총을 들고 가담했다면 죽거나 군 당국에 처형당하거나 군법회의에 넘어갔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었다.(반충남, 앞의 글)


사실 병기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학생들이, 그것도 여학생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정규군과 맞서 일사불란하게 싸웠다는 말 자체가 우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진압군은 이들의 저항을 ‘조직적이고 극렬한 저항’으로 묘사했지만 실상은 진압군의 공격을 죽창이나 총으로 방어하는 데 급급한 ‘비조직이고 무모한 저항’일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의 전말이다.(반충남, 「여순반란사건, 인민재판은 없었다」, 월간 <말> 1998년 11월호)


결국 진압군이 학생들의 ‘완강한 저항’을 강조하게 된 것은 10월 23일과 24일에 있었던 정부 1차, 2차 진압작전의 무리한 전개와 그 실패를 면피하기 위한 시도였다. ‘민간인 주도설’ 발표와 함께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는 정부와 군의 ‘토벌작전식 진압’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실제로 여수 진압시 국군은 육․해․공을 동원한 입체작전을 펼쳤다.


비행기가 정찰활동에 동원된 이후 바다에서는 해군의 사격이 있었으며 시내에서는 81밀리 박격포와 30밀리 중기관총을 사용하였다. 이때 일어난 화재는 전 시가를 검은 연기로 뒤엎었고, 여수는 죽음과 공포의 도시로 바뀌었다.


(5) 이승만 정부는 민간인에 대한 무리한 진압에 따른 비판의 목소리를 냉전논리로 잠재웠다. 윤치영 내무부장관이 11월 8일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한 폭동이 일어났으며 원산에서만 6천명이 학살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한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미군은 북한에서 소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규모의 조직된 저항이 있었다는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서는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결국 윤치영 장관의 ‘허황된 발표’는 남한의 여순사건이 가져올 신생 정부의 위약성과 정통성 부재를 외부의 북한정권에 대항한 더 큰 규모의 반란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173p)


그것은 ‘1948년판 북풍사건’이라 할만 했거니와, 거의 모든 일간지가 이 사건을 일제히 1면 또는 사회면을 통해 대서특필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부와 언론의 여순사건 왜곡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은 진술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여 순사건의 많은 사실들은 과장되거나 은폐되고 근거없이 확대되면서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허위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신화가 되었다. 당시 신문은 기본적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했고, 이후 관련 기록들은 한쪽의 일방적 시각 밑에서 서술되었다. 여순사건 연구가 먼저 사실에 대한 규명부터 출발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김득중, 「여순사건 당시의 민간인 학살」, 362p)


4.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현재

2001년은 여순사건 발생 53주년이다. 그런데 여순사건 53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중이던 다큐멘터리 장편영화 「애기섬」의 제작이 한 언론사의 ‘색깔논쟁’에 의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 인류와 한민족이 냉전과 대립으로 얼룩진 20세기와 결별하고 화해와 통일을 향해 나아가기로 약속한 21세기 벽두에 발생한 이 사태는 여순사건 왜곡보도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확인시켜준 사례이다.


다큐영화 「애기섬」은 2000년 7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2001년 9월까지 모든 제작을 마치고 10월 19일부터 여수와 순천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다. 1시간 20분 길이로 제작 중이던 이 영화는 홍영기 순천대 사학과 교수의 안내로 여순사건 당시 반대편에 서 있던 관련자 등을 찾아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논픽션과, 한 평범한 가족의 비극을 재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모색하는 픽션의 요소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부터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여수와 순천에 있는 재향군인회와 상이군경회 등 15개 보수단체가 공동성명을 내고 문제를 제기했으며 군의 향토사단 역시 제작과정에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 내용이 일부 수정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영화제작이 중단될 정도의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한 언론사가 이 영화에 대해 ‘사상검증’을 제기하고 나서면서 ‘공든 탑’은 와장창 무너졌다.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는 영화 「애기섬」을 “여순 14연대 좌익 반란사건을 통일운동의 성격을 띤 것처럼, 그리고 국군의 진압을 양민학살로 부각시키고, 국군이 함포사격으로 양민 1천명을 죽였다고 조작한 영화”라고 규정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우종창 <월간조선> 기자는 그 근거로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에 적혀 있는 여순사건 관련 기록을 제시하는 한편 몇몇의 취재원과 나눈 대화내용을 소개했다.


그러나 필자는 <월간조선>의 이러한 단순명쾌한(?) 결론은 ‘도그마적 역사인식’과 ‘부실한 확인취재’에 바탕한 함량미달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단순하고 고정적인 역사인식에 바탕해서 사고와 판단을 전개하면 총체적이고 탄력적인 상황인식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예컨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미궁에 빠져 있던 김구 암살 사건의 경우 최근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서 그 진상이 점차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우 기자는 역사에 대한 정의와 개념도 이렇게 유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선 우종창 기자의 기사를 정독해 보니,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대략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1) <월간조선>은 “국군이 함포사격으로 양민 1천명을 죽였다고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은 기사에서 “이 영화에서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건이 고증을 거쳐 사실로 확인된 것처럼 묘사하는 장면이 일부 등장한다. 이는 역사의 왜곡이 아니라 역사의 조작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국군이 여수시에 함포사격을 했다는 장면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우종창 기자는 자신이 제기한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한 여수지역 6․25참전자회 관계자와의 인터뷰, <한국전쟁사>에 실린 관련 기록 확인, 종군기자단의 기록 확인 등 4가지 근거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해군 함정이 출동하였으나 포격 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다.”


• 한 여수지역 6․25 참전자회 관계자와의 인터뷰 : “함포사격은 처음 듣는 얘기이다.”

• <한국전쟁사>에 실린 관련 기록 확인 : “함정에서 박격포를 쏘았다는 내용은 있지만 함포사격은 아니다.”

• 종군기자단의 기록 확인 :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 함포사격 사실여부는 차치하고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취재의 수준과 범위가 너무나 부실하고 협소하다는 점이다. 우선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기록만을 취하거나 그런 취재원만을 만난 것이 아니냐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진압작전시 함포사격을 했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월간조선> 기자는 국방부 관계자나 여수지역 6․25 참전자회 관계자만 만나기 전에 이 지역 향토사학자 김계유 씨의 증언부터 점검해야 했다. 김씨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여수를 삼면에서 포위한 뒤 반군도 없는 거리에, 6만명의 동포가 살고 있는 거리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전 시민을 포로로 삼은’ 진압작전의 현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육 지에서는 사방에서 콩 볶는 것 같은 총 소리! 따아 따아 따아 하고 쉴 새 없이 뿜어대는 기관총 소리! 쿠웅 쿠웅 쿠웅 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박격포 소리! 바다에서는 아무데나 용서 없이 쏴대는 함포사격 소리! 하늘에서는 귀를 째는 비행기의 굉음! 좌우간 이 순간의 여수는 마치 지구 최후의 날을 연상케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김계유, 「내가 겪은 여순사건」, <여수문화> 제5집)


한편 <월간조선>이 1993년 발간한 <한국현대사 119대 사건>에 여순사건 관련 원고를 게재했던 주인공이자 종군기자단의 일원이었던 이경모 씨(당시 호남신문 사진부장)는 자신의 회고문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여 수탈환은 10월 24일부터 시작되었다. 송호성 장군이 진두지휘를 하며 공격하였으나 워낙 반군의 반격이 심하여 첫 번째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26일 밤에 새로 투입된 장갑차를 앞세우고 재공격을 시작하여 곧바로 여수시 외곽에 진입한 국군은 27일 새벽녘에 함포사격을 시작하면서 전세를 유리하게 역전시키게 되었다.…함포사격이 끝난 뒤의 여수 시가지는 계속 불타고 있었으며 27일 밤의 여수 시가지 야경은 대낮의 살기 띤 상황이 언제였냐는 듯 아름답기만 하였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1948년 10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도 ‘함포사격’이라는 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26일 대한민국 육군총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여수에 대하여 2면 공격으로 남방으로부터는 여수항에 머물러 있는 해군 함정에서 발사하는 37미리 함포의 탄막 엄호하에 수륙양면작전을 써서 여수상륙에 성공하였다 한다.


따라서 <월간조선>은 영화 「애기섬」을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건이 고증을 거쳐 사실로 확인된 것처럼 묘사한 영화’라고 단정짓기 이전에, “함포사격이 있었다”는 다양한 증언과 기록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이것에 대한 면밀한 고증과 객관적 검토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2) <월간조선>은 영화 「애기섬」의 제목으로 따온 ‘애기섬’이 보도연맹 학살장소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두 가지의 근거가 제시됐는데,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한 여수지역 6․25참전단체 관계자와의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 “그런 역사적 기록이 없다.”

• 한 여수지역 6․25 참전단체 관계자와의 인터뷰 : “여순사건 무렵 애기섬에서 희생자가 있었다는 증언은 있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만 보더라도 이 논거의 질은 너무나 부실하다.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것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불확실한 증언(달리 표현하면 “정확한 사실은 모른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만을 근거로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은 기자로서 성실한 자세가 아니다. 따라서 <월간조선>은 여수지역 시민단체가 수년에 걸친 현장발굴과 증언청취를 끝낸 뒤 정리한 다음과 같은 보고서부터 읽어야 할 것이다.

“여 순사건이 종료되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키고 이들을 관리하였는데 여수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은 거의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사건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6․25가 터지자, 정부는 전국에 걸쳐 이들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합시키고 이들을 처형하였다.


율촌, 소라, 삼일, 쌍봉과 여수의 내륙지방은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간 후 총살하고 수장하였는데 당시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약 120명 이내로 추정된다.”(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자료집2>, 16p)


(3) <월간조선>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 내용 등을 열거한 뒤 “이 영화가 국군진압을 양민학살로 지나치게 부각시켰다”고 주장했다.

“장 면 21 : 이른 새벽. (10월) 23일 순천이 탈환됐다. 군경은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이름으로 피의 보복을 시작했다. 그냥 죽어야만 했다. 의심만 가도, 손가락질만 당해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죽어야만 했다. 눈먼 총부리의 역사. 이것이 한국사의 최대 비극, 집단 민간인 학살의 시작이 될지는 역사도 모르고 있었다. 그 시절의 군인과 경찰은 삶과 죽음의 감별사였다.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였다. 초등학교에 수천명씩을 모은 뒤 정확한 판단도 없이 의심만 가면 그 자리에서 수십명씩 죽였다.”


그러나 앞에서 칼-마이던스 기자의 증언에서도 확인했듯이, 이 내용은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들이다. 다소 내용이 길긴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향토사학자 김계유 씨의 말을 들어보자.


무 슨 영문인지 모르고 끌려왔던 사람들은 곧 ‘심사’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그제서야 여기 끌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존 경찰관을 선두로 우익진영 요인들과 진압군 병사로 이루어진 5~6명의 심사요원들이 시민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사람들의 얼굴을 쑥 훑고 다니가다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교사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려가 불문곡직하고 즉결처분(총살)되어 버렸다.


그 자리에는 일체 말이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무언(無言)인 가운데 이루어졌다. 사람을 잘못 봤더라도 한번 찍혀 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임사호천(臨死呼天)이라고 사람이면 누구나 죽게 되면 하늘을 부른다고 했다. 그때 여수 사람들의 심정이 바로 그랬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정문에서는 간혹 소탕작전에서 잡혀오는 것으로 보이는 파리한 몰골의 앳된 젊은이들이 2~3명씩, 혹은 4~5명씩 묶여와 교사 뒤로 끌려가면 어김없이 탕탕 하는 기분 나쁜 총소리가 뒤따라 사람들의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김계유, 「1948년 여순봉기」, <역사비평> 겨울호, 283~284p)


실제로 이날 진압과정이 지나쳤다는 고백은 당시 진압군 측에서도 나온 바 있다. 백선엽 장군은 <실록 지리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의 성화로 조급하게 이뤄진 작전으로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포격이 이뤄져 많은 시민의 희생을 낳았다”고 일부나마 그 잘못을 시인했다. 따라서 영화 「애기섬」이 “국군의 반란군 진압을 근거도 없이 비방”(<월간조선 2001년 10월호, 225p)했다는 <월간조선>의 주장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근거 없는 비방’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월간조선>은 여순사건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이런 기사를 가슴에 손을 얹고 읽어보기 바란다.


나 는 상사의 명령으로 순천탈환전에 참가했을 때에도 솔직히 말하면 반군에게 아무런 증오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순천시에 돌입하여 시가 대로상에 동지들의 시체가 늘비하게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병사들이나 나 자신이나 별안간에 불길 같은 증오감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순천을 완전 점령한 지금에도 나는 ‘점령’이라는 말을 결코 쓰려고 하지 않는다. 동족간에 자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점령이 무슨 점령이란 말인가? 나로서는 피눈물 나는 싸움이었다.(조선일보 1948. 11. 23. 「정비석 : 여순낙수(2)」)


(4) <월간조선>은 또 하나의 편향적인 왜곡보도를 하는데, 종군기자인 이경모의 사진 중에서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것만을 가져다가 소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종창 기자는 “여수시 탈환작전 때 종군기자단은 군을 따르고 있었다. 전 호남신문 사진부장 이경모 기자도 종군기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언급한 뒤 “그가 찍은 한 장의 사진, 아기를 업은 채 경찰관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는 사진은 이 사건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단정했다. <월간조선>은 실제로 이 사진을 기사 첫 페이지에 소개하기도 했다. 원래 이 사진의 출전은 이경모의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인데, 문제의 사진은 이 책의 66쪽과 67쪽에 걸쳐 수록돼 있다.


그런데 이 사진 바로 뒤에는 또 다른 성격의 사진이 있거니와, “경찰은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면서 가둬두고 있던 좌익 사상범 용의자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갔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은신하고 있던 김영배(당시 21세)가 그런 희생자 중의 하나였다. 그의 가족들이 광양과 순천의 경계에 있는 덕례리 골짜기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내 거두고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진은 이 책의 표지 사진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김영배와 친구인 이경모는 자신의 회고문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로 결코 공산당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의 대학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내려와 공부를 하다가 대학 사정이 좀 안정되면 다시 상경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좌익 사상범 용의자로 광양경찰서에 예비검속되어 반란군에 쫓겨 후퇴하던 경찰관에 학살당한 것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더욱이 이 사진집의 뒤 표지에는 한 사진작가의 이런 발문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월간조선>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경모의 사진들은 이미지의 힘을 통해 8․15 해방에서부터 여수․순천사건을 거쳐 6․25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고리들을 우리의 눈앞에 또렷이 부각시켜 준다. 물론 사진이 항상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진이 진실을 말해주는 경우는 어떠한 편향된 의도나 오해에도 물들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할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경모의 사진들은 감동적이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며, 때로는 우울하기도 한 여러 장면들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편향없이 보여준다.


결국 <월간조선>은 한 사진기자가 ‘편향 없이 객관적 입장을 견지한 채 기록한 역사적 진실’마저 놀랍게도 ‘편향되게 악용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월간조선>의 보도태도에서 두려움과 동정심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이다.

(5) <월간조선>은 기사에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해 일으킨 무장폭동’이라고 규정한 제주4․3사건을 이 영화에서는 4․3항쟁이라고는 용어를 사용, 폭동을 의거 수준으로 미화시켰으며 여순 14연대 반란사건도 그냥 여순사건이라 호칭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월간조선>은 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의 고정된 역사인식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시비를 걸기 이전에 다음과 같은 ‘한탄’과 ‘분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여 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소장은 “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에도 ‘여수순천10․19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회단체와 연구학자들이 50년만에 어렵게 바로 세운 ‘여순사건’을 <월간조선>이 다시 ‘여순반란사건’으로 만들어 놓았다. <월간조선>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지역사회의 민감한 정서 때문에 사건 발생 53년이 지난 올해 겨우 출범한 여순사건 유족회 여수지역 회장 김상태씨는 “유족의 아픔을 이해한다면 더 이상 색깔론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라며 분노했다.(나권일, <시사저널>, 2001. 10. 25.)


이 기사의 제목이 「10․19 여순 ‘영화불발’ 사건」이거니와, <월간조선>은 여순사건이 국사교과서 197쪽 도표에 분명히 ‘여수순천10․19사건’이라고 객관적 용어로 기술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월간조선>이 ‘전가의 보도’로 삼고 있는 국사교과서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전향적으로 개편하려던 시도를 ‘색깔 논쟁’을 동원해 좌절시킨 장본인이 정작 조선일보 아닌가. 애시당초 그들에게 교과서 타령을 할 자격이 없었다는 말이다. 문민정부 시절 조선일보가 불을 지르면서 ‘더러운 논쟁’(?)에 휘말려들었던 이른바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의 전말은 이렇다.


1993년 9월 교육부는 제6차 교육과정 개편에 따라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원회’(위원장 이존희 서울시립대 교수)를 구성하고 9명의 연구위원을 임명했다. 이들은 7개월에 걸친 공동연구를 통해 국사교과서 개편작업을 추진했으며, 마침내 1994년 3월 18일 심포지엄을 열고 연구위원 전원합의로 확정한 ‘준거안’을 발표했다. 특히 현대사 부분 준거안 중에서도 새롭게 보강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시선을 끌었다.


•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기술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 반민법 제정, 농지개혁 등 건국 초기의 활동과 제주4․3항쟁, 여순사건 등을 이해하게 한다.

이 준거안은 당시 역사학계의 학문적 업적과 수준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중앙일간지 중에 유일하게 심포지엄에 직접 참석한 문화일보 기자의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그가 쓴 기사의 제목은「국사교과서 민족사관 중심 개편 -일제잔재 청산․독립운동사 대폭 보강」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조선일보가 특유의 ‘마녀사냥’ 전술을 동원해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1994년 3월 20자 조선일보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해 방 직후 4․3 제주도 봉기, 여순반군투쟁, 영남봉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투쟁 속에서 민중은 현명한 지혜를 발동하여 도시대중시위, 농촌봉기, 산악유격전, 파업농성 등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86년 8월 18일자 서울대 자민투의 기관지 <해방선언>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그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 곳곳에서는 여순반란과 4․3사건을 ‘반제반봉건민중항쟁’, 6․25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조선일보의 ‘눈부신 활약’(?)을 필두로 한 수구언론의 여론조성 속에서 준거안은 멱살잡이를 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준거안 전체의 맥락을 읽기보다는 ‘항쟁’이냐 ‘사건’이냐는 등 용어 문제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동시에 「주사파 등 80년대부터 새 작업」, 「북한 선전자료 복사판 우려」 등의 기사를 통한 전형적인 ‘색깔논쟁’을 유발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세계일보 등 일부 언론이 “역사에서의 ‘고정관념’과 ‘이념편향’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학자가 만든 시안을 매카시즘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연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정재정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1998년 발간한 저서 <한국의 논리 - 전환기의 역사교육과 일본인식>에서 “인신공격성의 비난과 사상공세적인 위협이 난무하였다. 학문과 교육을 논한다는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 문제에 정치와 여론의 입김이 너무 직설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점은 앞으로 역사교육의 독자성과 중립성을 확보해 나가는 데 있어서 적지 않은 멍에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토로했다.


‘마녀사냥’에도 논리가 있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빛과 어둠의 논리’이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쓰는 ‘흑백논리’라는 말과 상통하는데, 조선일보가 펼쳤던 색깔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래서 무조건적으로 악은 선의 존립을 위해서 그리고 악한 영혼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와 정당화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은 선을 위해서 이단이나 마녀라는 악을 학살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죄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선악에 대한 기준이나 잣대도 없이 또는 터무니없는 잣대로 선악을 재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내용이 주로 자신을 위한 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옹호하는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들을 비판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무리는 이단으로 처형해 버리면서 자기들의 선악 논리를 정당화시켜 나갔던 것이다.(오성근, <마녀사냥의 역사>, 108~109p)


5. 에필로그 : 냉전에서 화해로 가는 길목의 3가지 삽화

(1)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긴 하지만, 기자들 중에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취재한 사람도 있다. 민주일보 기자 홍한표와 합동통신 기자 설국환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의 글에는 기존의 일간지가 잘못 보도한 사실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계엄령이 내려진 극한적 상황에서 씌어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려 한 점이 돋보인다.


물론 이 글들은 여순사건이 마무리된 시점인 1948년 11, 12월 사이에 발표된 것이기 때문에 좀더 차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설국환은 취재를 하면서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는다. 예컨대 순천에서 도망 나온 경찰관이 둘러대는 엉터리 증언을 간파한 뒤 현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사 실 순천여수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반군과 반도가 방화와 강도질을 자행하였고 강간과 시체파괴를 여지없이 하였을 뿐더러 살해에 있어서 경찰관의 전 가족을 몰살하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나 현지의 사체에서 부녀자 노인의 시체는 거진 볼 수 없었을 뿐더러 시체에 손을 댄 흔적도 별로 보지 못하였다.


다만 수인의 경찰책임자와 국군장병의 가족을 살해하였다는 이야기를 당사자의 구전으로 들었을 뿐이며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 적발에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는 다소의 에누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설국환, 「반란지구답사기」, <신천지> 1948년 11.12월호 합병호)


반군의 만행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였던 당시의 신문기사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냉철했던 설국환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냉전시대로 들어서면서 반공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 것이다. 그는 사건 당시 썼던 내용을 수정․보완한 글을 1965년 발표했다. 그런데 이 글에 「공산반도의 만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건 당시 비교적 객관성을 갖춘 기사로 평가받았던 글이 반공적인 성격의 글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다. 1960년대의 냉전적 사회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 금단의 성역에 갇혀 있던 여순사건이 대명천지에 얼굴을 내밀었다. 19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여순사건 당시를 회고하거나 증언한 자료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로 좌익계 빨치산 인사들의 자전적 증언, 진압을 주도했던 군경 수뇌부의 회고록, 지역민들의 체험이나 목격담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좌익계와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나 목격담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끈 시민들의 자신감이 출판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그 동안 금기시 되었던 빨치산 관련 책들이 그야말로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었다.(홍영기, 앞의 글, 167p)


빨치산 수기물 등에 대한 언론과 출판의 뜨거운 반응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여순사건을 소재로 삼은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다음과 같은 토로에서 우리는 당시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이 렇듯 어렵게 취재를 해가며 제1부 세 권을 단행본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6월 항쟁이 일어났고 뒤따라 ‘6․29항복’이 있었다. 세상이 조금 달라지면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다시 한 해가 바뀌면서 그 물결을 타고 빨치산 수기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 잡지들도 서로 다투어 옛 빨치산들을 찾아내 기사를 써 내느라고 정신없이 번잡을 피웠다. 약삭빠른 상업주의의 본색이었다.”(조정래, 「<태백산맥> 창작보고서」, <작가세계> 95년 가을호, 109p)


(3)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에 따라 ‘온풍’은 ‘냉풍’으로 급변하였다. 1994년 북핵사찰 문제로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덩달아 여순사건을 다룬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수난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4월 11일 8개의 극우단체가 작가 조정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으며, 때맞춰 <월간조선>도 5월호에 「소설 <태백산맥> 조정래의 현대사 왜곡」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색깔공세에 합세했다.


이러한 변화는 53년 전에 일어났던 여순사건이 과거의 사건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시대와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동시에 여순사건 왜곡보도를 극복해야 할 과업이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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