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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맥주에 스미는 인문학)

 

수다7: “히딩크는 축구만 전해준 게 아니었다!” - 네덜란드와 벨기에 맥주

 

고상균

 

 

1

밀양에 다녀왔다. ‘그윽한 볕이 가득하다는 지명의 뜻과는 달리 지금 이 순간 그곳은 세상 어떤 곳보다 어둡디 어두운 곳이었다. 앙상하니 흔들리는 두 다리에 수술 흔적이 선명한 할머니가 길을 열라고 발버둥을 치고, 이를 히죽이며 구경하듯 둘러싸고 있는 방패너머의 손자뻘 전경들.......보상도 필요 없고, 그저 살던 것처럼만 살게 해 달라는 호호할머니, 백발할아버지들의 노쇠한 외침이 국가권력과 그에 편승한 (터리 언)들에 의해 먼 놈의 님비족도 되었다가 빨갱이도 되었다가 국가발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자가 되기도 하는 땅.......지난 일 년 내내 몇 개의 원전이 고장과 결함으로 멈춰있었는데도, 전력공급에 문제가 없었건만, 왜 또 원전을 지어야 하고, 이를 공급하기 위해 멀쩡한 산과 논, 삶의 터전을 멋대로 가로질러 송전탑이 세워져야 하는지 설명도 없이 그저 필요하니까, 중요하니까 지어야 한다는 나라.......바빠서, 그저 바빠서 좀 더 일찍 함께하지 못했다는 변명에도 그저 고맙다며, 참 감사하다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내게 과자 봉지 두 개를 전해 주시려던 어르신의 손길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 방송에서 스포츠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자신과 연관된 열애설을 해명하는 글의 말미에서, “나라가 이 꼴인데 연애는 무슨?”이라고 했다는데, 비단 그 글을 인용하지 않고서라도 이놈의 세상은 힘없고 빽 없으면 맘 편히 제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잠 한숨 자기도 어렵다. 참 목마른 세상이다. 이렇게 머리가 무겁스리 한데다가 목까지 타는 듯 마를라치면 나는 늘 생각나는 맥주가 있다. 그건 하이네켄이다.

 

2

독일, 영국, 체코 등 맥주하면 떡 생각하는 맥주 강대국들에 비해 땅 덩어리도, 소비와 생산량도 무척 적어 보이지만, 7도가 넘는 보크맥주(Bock Beer)11도에 이르는 스트롱 에일이 공존하는 나라, 최신식 필스너와 고리짝부터 전해지는 전통방식의 람빅이 함께 유통되는 곳, 쫌 이름 있다는 술집에 들어가면 40여 가지가 넘는 맥주에다가, 그만큼의 전용잔을 구비하고 있는 동네.......하이네켄이 태어난 네덜란드와 인접국 벨기에는 작지만 다양하고 환상적인 맥주천국이다. 이 가운데서도 세계 맥주 점유율에서 늘 5위안에 들어서는 하이네켄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상표임에 분명하다. 한국에서는 지난 2002 월드컵의 스타, 히딩크로부터 시작된 네덜란드 알기열풍을 타고 화려하게 등장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참 밍밍하다라고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들이켜는 처음부터 목구멍을 넘어가는 마무리까지 유지되는 청량감은 내게 있어 정말이지 가뭄 끝에 찾아오는 단비, 진즉에 돈 떨어진 월말에 갑자기 생긴 꽁돈과도 같다.

어디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네덜란드에서 비단 하이네켄에게서만 찾을 수 있을까?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네덜란드 지역 판매량 부동의 2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롤쉬의 진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향에 빠진 이들은 그롤쉬 특유의 스윙 탑(Swing Top, 맥주 향을 꽉 잡아두기 위해서라고 하며, 개인적으로는 기름병으로 요긴하게 재활용한다!) 병만 봐도 마음이 설렌다.

 

3

한편 품질 향상이건, 가진 자의 배를 더 채우기 위해서건 간에 독일과 영국 등의 맥주대국들이 무엇은 맥주가 아니라거나 무엇만 맥주라거나 하는 식의 규제를 강화하고 있었을 때, 오히려 그 반대로 건강에 위해한 것이 아니라면 누가, 무엇을 이용해 제조하건간에 맥주로 인정하고 공존을 모색했던 벨기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맛과 향 가득한 맥주의 보고이다.

아직도 벨기에 맥주하면 영 낯설다면! 지금은 오가든(오비맥주 시설에서 생산된다하여)이 되어 이상해졌지만, 여전히 생맥주에서는 발효과정 중 첨가된 오렌지 껍질로 인해 더욱 진한 과일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후가르텐의 나라라고 하면 아하! 하실라나?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전통발효방식의 람빅과 수도원 전통의 트라피스트 계열 맥주의 현존 최고(最古)의 생산지 역시 벨기에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8.5도의 높은 도수임에도 불구하고 체코산 사츠 홉의 샤한청량감과 파워풀한 뒷맛에 속아 정신없이 마시다보면 순식간에 취기가 오르는 악마의 맥주, 듀벨또한 벨기에가 자랑하는 세계적 명품이다. 이렇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거대하지 않지만 분명한 맥주의 지류를 형성하는 가운데, 획일화에서 벗어나 작지만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맛과 향의 세계를 구축했다. 이는 순수령 등의 규제를 철폐하여 작은 것들의 특성과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4

앞서 언급했던 모 아나운서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그렇다. ‘나라가 이 꼴인데 맥주는 무슨?’ 그런데 말이다. 온 세상이, 아니 세상 모든 권력을 가진 이들이 딱딱하고 근엄하게 살라고, 획일화되고 천편일률적으로 행동하라고, 까라면 까는 시늉이라도 해야 일류시민이라고 강요하는 이때(그래서 연예인들을 군인으로 둔갑시켜 그들의 일사분란 함(?)을 감동이라 보여주는 것일까?), 그게 다가 아니라고, 너희들이 이토록 우울하게 만들어버린 세상에서 결코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자리에 술이 빠질 소냐? 이 나날이 재미없어지는 세상에서 한 잔 맥주의 여유와 웃음에서 힘을 얻고 다시 한 번 살아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아마도 그래서 요한복음 공동체는 교주의 공생애 활동의 시작을 혼인잔치 술판으로 묘사했던 것은 아닐까?(기독교 판에서 교주 예수님을 건드리는 건 신성모독이 될 수도 있지만서두.......흠흠.......)

조선의 중흥기를 열었던 정조는 당쟁으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정적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신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개혁군주의 열망을 오롯이 담아 일으킨 화성(華城)의 잔치자리에서 긴 술자리를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어명을 내렸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정조의 취기어린 명령에는 한 잔 술을 통해 정적에게 겨누는 칼날도, 그들을 향한 복수도 접겠다는, 그러니 내가 꿈꾸는 탕평의 세상으로 함께 가자는 상생과 다양함에 대한 넉넉한 포용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신하들과 정조, 심지어 함께했던 수행원들까지 밤새 취하는 가운데 조선의 역사는 새로 시작되었다. 당장 80이 넘은 노인을 잡아가두는 강정의 만행과 평생을 일궈 온 땅에 떡허니 송전탑이 설치되는 비극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우리! 다시 한 번 그 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보자! 지치면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맥주 한 잔 하면서 말이다!

Atachment
첨부파일 '1'
  • 광야지성 2014.09.27 17:38
    이 글은 송전탑 건설반대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지난 해에 작성된 것이다. 지금 밀양에는 고지된 송전탑이 모두 들어섰지만, 그 곳의 어르신들은 '저 흉칙한 것들을 뽑아낼때까지 싸우겠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시대의 예수님들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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