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선교 쎈터 길목에서 ‘강좌’가 가능한 신학적 조건에 대한 탐색
- 길목을 뒷받침하는 신학은 무엇인가? - (2013. 8. 31.)
김 석 채 전도사
길목협동조합은 어떤 신학 위에서 활동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민중신학’이다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신학을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발전 과정에 있는 신학으로 볼 것인지? 에 따라 입장은 많이 달라진다. 그리고 민중신학과 그것의 현대화를 이념형으로 진행하는 세미나는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연구집단 카이로스’에서 이미 하고 있다. 물론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의미에서 세미나는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길목은 이 연구집단과 차별되는 ‘어떤 대상을 향해’, ‘어떤 민중신학으로’ 세미나를 진행하려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은 ‘길목이 어떤 신학 위에서 활동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
‘사회선교 쎈터’라는 말의 ‘선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협동조합은 기독교와의 연관성 속에 서 있다. 그러므로 길목은 ‘사회’와 ‘기독교’를 매개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 매개가 곧 신학이므로, 신학이 혹은 진지한 신학적 과정이 길목에 요청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어떤 학문을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본다는 것은 토론과 심화를 본질로 하는 학문의 본령에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발전과정에 있는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어떻게 길목의 밑받침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민중신학의 두 요체를 일단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의 ‘정치적 저항성’과 ‘민중지향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요체가 민중신학이 태동한 동기였으므로, 그리고 이것이 변한다면 이미 민중신학이 아닐 것이므로, 민중신학이 발전하더라도 이 두 요체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어떤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인가? 이다.
2013년의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 안에 재편되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한 이후 전일화된 세계체제이다. 신자유주의는 이제 전일화되었기 때문에, 눈치 볼 것 없이 브레이크 없는 대형화물차처럼 질주하고 있다. 이 안에서 세계의 인민들은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신체적· 심리적으로도 큰 고통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 경제는 확대 재생산을 위하여, 자연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현란한 상업적 기호들을 통하여 인민의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파고 들었다. 그것은 인민의 일상과 삶 전체를 조직적으로 점령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인민 모두를 탈정치화된 정체성으로, 비정치적 위치로 떠밀어가고 있는 것이 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 생존 전략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함몰된 한국의 수구 정치집단은, 대담한 부정 선거를 저지르기도 하고, 70년대식 파쇼적 공안정국을 기획하기도 하는 등, 대중 우민화로 열악해진 민주주의 역량을 이용해 자신의 영구집권을 획책한다.
이 같은 황무지 같은 상황에서 길목협동조합은 작지만 큰 몸짓을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길목과 함께 역사하시길 기도한다. 그렇다면 길목협동조합의 구체적 모토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영적 총체성’ -신앙이 없는 이성은 교만이고, 이성이 없는 신앙은 광신이다. -
서양 근대 초기에 나타난 계몽주의는 인민의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존재의 확대를 낳았다. 이것이 계몽주의가 표방한 ‘이성’의 업적이다. 그러나 종교에서 볼 때, 초월적인 것은 곧 인간적인 것이라고 하여, 모든 초월성을 부정한 것은 이성의 교만이다. 이것의 통렬한 반증을 세계 1, 2차 대전이 보여줬다. 가장 ‘이성적인’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이 일어났다. 인간의 마음은 깊은 심연의 어두운 욕망에 휘둘린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서 이성의 무력함이 나타나고, 다시 영에의 호소가 시작된다. 신앙이 없는 이성은 교만이자 자기파괴이며, 이성이 없는 신앙은 광신이다. 그런데 성서의 기적과 계시를 포함하는 신앙은 이성과 모순 관계가 아니다. 이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요소들이다. 이것을 모순관계로 파악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와 공존할 수 없다고 본 것이 근대의 비극이다.
안병무와 초기 교회 멤버들이 세운 향린교회는 이 근대성의 끝자락 어디엔가 위치하고 있다. 세계사에서 기존 교회는 예수가 보여준 정치적 저항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것이 우리 현실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그러나 성서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 16:19)라고 말하고 있다. 향린의 위대한 전통은 이러한 ‘정치적 저항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안병무와 민중신학 1세대들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 한계는 그들이 ‘방법론적으로’ ‘자유주의’의 범주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성과 초월성을 모순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이 없는 신앙은 광신이고, 신앙이 없는 이성은 위험하다. 그런데 이 신앙에서 초월성이 부정된다면 그것은 다시 이성이 되고 만다.
바르트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해와 교만을 『로마서 강해』를 써서 통렬히 반박하였다. 바르트는 그 자신 사회주의자였지만, 자유주의적으로 근대성 안에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다. 오늘날 영의 문제는 이성의 절대화 즉 인본주의화로 피폐해진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회 체제에 저항하고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신학적 관점이다. 아니 이런 기능적 이유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적 존재를 봐야 제대로 신앙하는 것이다. 향린은 정치적 저항성의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고, 오늘도 그 전통 속에 살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인간을 판단하는 하나의 율법적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 전통을 통해서 우리가 ‘의로워 지는 것’이 아니다. 그 저항적 전통은 성서의 말씀에 복종하는 하나의 실천이자, 하느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일 뿐이다.
오늘 길목의 출발은 큰 프로젝트이다. 40주년에 약속한 것이기에 60주년을 계기로 실천하자는 단순한 차원에서 출발한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의 실천의 함의는 이렇듯 만만한 것이 아니다. 자연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무너지며, 인간성이 황폐해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확장이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오실것이지만 이미 여기에 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응답 중 하나가 ‘길목’이다. 그러므로 길목은 지금 ‘영적 총체성’ 위에 서야 한다. ‘사회도덕주의’로 환원된 신학은 율법주의의 교만에 빠진다. 어떻게 길목이 이러한 현실을 ‘영적 총체성’으로 무장하여 돌파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에 타계적 신앙에 빠진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신앙에로 불러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구체적 실현방식은 무엇인가?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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