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년 전 한 청년을 만나고 나서 민김종훈 신부는 무지개 빛깔 묵주를 만들게 됐다. 성 정체성 때문에 교회에서 큰 상처를 받은 청년이었다. 그의 아픔을 위로하고 연대한다는 의미를 담아 만든 묵주다. ⓒ뉴스앤조이 임수현 |
가톨릭 묵주와는 다르지만 성공회에서도 묵주를 기도의 도구로 사용한다. 1월 21일 저녁 향린교회 강단에 선 민김종훈 신부(대한성공회 교육훈련국·길찾는교회)는 무지개 빛 묵주를 들고 있었다. 7년 전 만났던 성 소수자의 아픔을 위로하고, 지속적으로 연대한다는 의미에서 무지개 빛깔 묵주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날 강의의 물꼬가 될 만한 이야기였다.
성공회 사제 2년 차, 민김종훈(신명 자캐오) 신부는 주 중엔 대한성공회 교육훈련국에서 젊은 또래 사목으로 주말엔 길찾는교회를 섬기고 있다. 길찾는교회는 성공회 교회 중에서도 조금 특이한 교회다. 전통적인 성공회 전례와 이야기가 있는, 교회 중심부가 아닌 교회 변두리에 머문 이들을 위한 교회다. 이곳에는 대안적 예식과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단순히 예배 분위기가 좋아 찾아오는 무신론자도 있고 기존 교회에서 외면받은 성 소수자도 있다. 오가는 이들에게는 소풍 같은 교회 머무는 이들에게는 함께 하느님의 꿈을 꾸는 교회, 길찾는교회가 가진 모토다.
길찾는교회는 20~40대에 속한 비교적 젊은 층이 주를 이룬다. SNS에 소개한 것 말곤 별다른 홍보가 없었는데 10개월 동안 20명 남짓한 이들이 모이고 있다. 민김종훈 신부는 길찾는교회에 모인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말에는 하느님이 자기 편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고 신부는 말했다.
하느님을 향한 가난한 마음이 있는 자리, 그곳은 언저리라고 민김종훈 신부는 설명했다. 예수가 오신 곳이 언저리라고도 했다. 언저리에는 무언가 욕망했지만 갖지 못한 상처, 거기서 비롯된 폭력과 생존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있다.
민김종훈 신부 역시 언저리의 인생을 걸어왔다. 모태 신앙으로 장로교 통합 측 교회를 다니다가 20대에 접어들면서 순복음 교회로 옮겼다. 가난한 이들이 많이 모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원 대천덕 신부를 만난 건 다니던 교회 안에서 충격적 사건들을 경험하고 많은 갈등을 하던 중이었다. 그 후 빈민 사목과 사회 선교 일을 하는 등 일련의 일을 통해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민김종훈 신부가 만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말씀은 몰라도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20장 16절 말씀을 알고 있었다. 언저리에 있는 이들이 이 말씀에서 위로를 얻는다는 뜻이다.
▲ 가난은 역전을 꿈꾼다. 민김종훈 신부가 만난 많은 이들은 다른 말씀은 몰라도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 말씀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임수현 |
예수가 언저리로 오신 건 그곳의 상처와 폭력을 묵인하기 위해서 혹은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고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민김종훈 신부는 이러한 치유와 해방, 구원의 시작점이 기독교에서 잊힌 이야기를 회복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가 예장통합 교회에서 순복음 교회로, 마침내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기독교에 대해 한 가지 깨달은 점이다. 기독교가 굉장히 풍성한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길찾는교회에서 교인들과 새롭게 싹 틔우길 원하는 일이 바로 그동안 기독교가 잃어버렸던 빛, 생명, 상징, 창조 세계 이야기이다. 민김종훈 신부는 교회가 모든 것의 답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이것들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교회와 신학은 정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잇는 실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에 모인 이들 각자에게 하느님의 숨결이 부어졌기에 서로의 이야기는 곧 교회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이 세상 모든 만물에 깃들어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했다. 서로 다른 이들의 사귐 속에 드러나는 다양성이야말로 하느님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민김종훈 신부는 말했다.
신부는 자신을 '잉여'라며 스스럼없이 소개하는 청년들이 성찬·애찬·사귐이라는 교회 전례에 속해 자신을 내어놓는 모습을 들꽃에 비유했다. 마치 깨지고 부서진 언저리 한 틈에 솟아나 뜨거운 생존의 기운을 내뿜는 민들레와 같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늘과 땅이 맞닿는 자리'라는 톰 라이트의 말을 인용하며 예배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 사회참여로 추동된다고 민김종훈 신부는 말했다. 전례에 담긴 빛과 생명, 상징과 창조 세계 이야기의 경험이 사회적 영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민김종훈 신부의 강의는 길목협동조합이 1월 20일부터 25일까지 저녁 7시 30분 향린교회에서 진행하는 '가난 교회 신학'이라는 강좌의 두 번째 순서였다. 이번 강좌는 사회참여의 성서적 기반을 닦는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6일 동안 이어지는 신학 강좌를 앞으로 길목이 지향할 강좌들의 오리엔테이션 격으로 봐도 좋다고 관계자는 일렀다.
▲ 한 수강자가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을 던졌다. 사회문제가 있는 곳곳에 뛰어들어 역할을 하는 것도 급급한 와중에 교회 내부 개혁에 힘쓰는 게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민김종훈 신부는 각 교회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되 건강함에 대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임수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