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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시 / 고은
두고 온 시
그럴 수 있다면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갓난아기로 돌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가 왜 없으리
삶은 저 혼자서
늘 다음의 파도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가던 길 돌아서지 말아야겠지
그동안 떠돈 세월의 조각들
여기저기
빨래처럼 펄럭이누나
가난할 때는 눈물마저 모자랐다
어느 밤은
사위어가는 화톳불에 추운 등 쪼이다가
허허롭게 돌아서서 가슴 쪼였다
또 어느 밤은
그저 어둠 속 온몸 다 얼어들며 덜덜덜 떨었다
수많은 내일들 오늘이 될 때마다
나는 곧잘 뒷자리의 손님이었다
저물녘 산들은 첩첩하고
가야 할 길
온 길보다 아득하더라
바람 불더라
바람 불더라
슬픔은 끝까지 팔고 사는 것이 아닐진대
저만치
등불 하나
그렇게 슬퍼하라
두고 온 것 무엇이 있으리요만
무엇인가
두고 온 듯
머물던 자리를 어서어서 털고 일어선다
물안개 걷히는 서해안 태안반도 끄트머리쯤인가
그것이 어느 시절 울부짖었던 넋인가 시인가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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