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길목길목

조회 수 1364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노동절 기념 예배 하늘말씀 나누기(2013.05.01.)-마석 모란공원

마 25:31-46  /  구원의 기준
 
오늘은 123회 세계 노동절입니다. 쉼을 누리면서 가족과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자본가들이 베풀어준 은혜가 아니라 피로 쟁취한 투쟁의 결과물입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권리는 권력자의 자비심이 아닌 민중의 힘에 의하여 얻어진 것들입니다. 역사를 짧게 보면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는 굴곡이 있지만, 길게 보면 왼쪽에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꿈꾸던 방향으로 진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무임승차하지 않으려면 또 다음 세대에게 진보된 역사를 만들어주려면 지금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기 위한 싸움에 적극 나서야할 것입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달력에는 근로자의 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정당한 이름과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라는 이름은 불온한, 불순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평신도 사순절 순례기간 동안 만난 노동자들의 공통적인 증언이 무엇이었습니까? 돈만 생각하는 자본가들이 장기 파업으로 인한 손실보다는 노사가 타협하는 것이 더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오랫동안 노동자들과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노동조합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는 근로자에게는 얼마든지 보상을 해줄 수 있지만,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는 노동자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책 중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90년 경 출판된 책인데 2010년 20만에 개정판을 내면서 전태일열사만 뺀 것을 보고 여전히 전태일이란 이름은 우리 시대의 불편한 이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 전태일 열사는 어느 모습 어느 위치에 있을까요? 여전히 일용직 비정규직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일 것입니다. 로마와 성전체제의 이중적 수탈에 신음하던 예수의 처지도 이와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사회에 수많은 죽임이 있었습니다. 반란의 땅 유대에서 수많은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왜 전태일열사와 예수의 죽음만이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요? 죽임의 가치가 경중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무게만큼 울림이 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전태일 평전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예수님이 삶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을 저는 이렇게 정리해보았습니다.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자비심이 있었습니다. 삶을 이끌고 간 것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엄함이었습니다.
의식과 실천이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계산이라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죄가 없었지만 불의한 체제에 죽임당했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죄없는 자를 죽이는 체제가 얼마나 불의한지를 폭로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누군가 진짜 죽음은 무덤에 묻힐 때가 아니라 기억에서 잊혀질 때라고 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태일과 예수의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 인간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면 하느님의 창조한 인간의 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최후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양의 자리로 갈 것 같습니까? 아니면 염소의 자리로 갈 것 같습니까? 아니면 중간에 있어서 앞으로 조금 더 노력하면 양의 자리로 갈 것 같습니까? 잠시 이야기를 곁가지로 벗어나보면 왜 하느님의 형상이 없을까? 그것은 누구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잘 몰라야 자만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훈으로 이 비유를 받아들이기에는 흔쾌하지 않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양과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둘 다 왜 그렇게 분류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은 겸손해서, 염소는 너무 교만해서 일까요?

 

제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얻은 깨달음은 양과 염소의 행위가 바로 그들의 일상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판/구원을 받는 기준/조건이 우리의 특별한 일이나 종교적인 행위/숙련/공적이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삶이 그 기준/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양도 염소도 특별하게 의식한 행위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삶의 행위들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이미 왔고 또 오고 있다는 의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나라는 이미 왔고, 또 다른 의미에서 오고 있는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염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나라에서 적응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염소가 양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이란 내 속에 창조되어 있는 하느님의 온전한 모습을 발현해내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하느님 나라와 최후 심판 이후의 하느님 나라가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혁명가나 명망가로 이름을 얻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 평민의 삶을 산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웃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갖혔을 때,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나눌 수 있으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 나라에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실천하는 기독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입니다.

 

예수와 전태일은 그런 삶의 전형을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온전히 삶으로 살아내면서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것이 참 인간의 모습이고 참 구원의 길입니다. 제가 가끔 되새겨보는 전태일열사의 1967년 2월 14일의 짧은 일기입니다.
“오늘도 보람없이 하루를 보냈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이야.”
어느 구도자의 삶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기억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와 전태일의 삶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기억하고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열사들의 투쟁과 예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잠시 주신 말씀을 묵상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카테고리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6 사용됨 에페소(5:30-33) -부부 제노 2013.05.04 14645
95 사용됨 에페소서 (6:1-3) -부모 제노 2013.05.04 15314
94 사용됨 집회서 (7:27-28) -부모 제노 2013.05.04 14711
93 사용됨 루가 (18:16-17) -어린이 제노 2013.05.04 15508
92 사용됨 마르코 (9:37) -어린이 제노 2013.05.04 15219
91 사용됨 귀가 /도종환 제노 2013.05.03 14107
90 사용됨 심원 안병무박사가 길목에 보내는 엽서-2013-05-03 file GILMOK0510 2013.05.03 15582
» 사용됨 노동절 기념 예배 하늘말씀 나누기 /김석환 제노 2013.05.02 13640
88 사용됨 심원 안병무박사가 길목에 보내는 엽서-2013-05-02 file GILMOK0510 2013.05.02 14611
87 사용됨 심원 안병무박사가 길목에 보내는 엽서-2013-05-01 file GILMOK0510 2013.05.01 14943
86 사용됨 일로 맑아지는 영혼 /박노해 제노 2013.04.26 14323
85 사용됨 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박노해 제노 2013.04.26 15281
84 사용됨 선한 의지는.../ 칸트 제노 2013.04.26 14457
83 사용됨 심원 안병무박사가 길목에 보내는 엽서-2013-04-26 file GILMOK0510 2013.04.26 15533
82 사용됨 심원 안병무박사가 길목에 보내는 엽서-2013-04-25 file GILMOK0510 2013.04.25 14373
81 사용됨 당신과 나의 삶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채 제노 2013.04.24 14394
80 사용됨 물동이 안에 나뭇조각 제노 2013.04.24 14547
79 사용됨 요한복음 (14:27) 제노 2013.04.24 16121
78 사용됨 심원 안병무박사가 길목에 보내는 엽서-2013-04-24 file GILMOK0510 2013.04.24 14608
77 사용됨 창세기 (3:19) 제노 2013.04.24 15000
Board Pagination ‹ Prev 1 ...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Next ›
/ 18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Recent Articles

Recent Comment

Gilmok Letters

사회선교센터 길목협동조합 | 삶의 작은 공간으로부터 희망을 함께 나누는 큰 길로 통하는 '길목'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100-845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3길 27-5(을지로2가 164-11) | 전화 02-777-0510 | 손전화 010-3330-0510 | 이메일 gilmok@gilmok.org
계좌번호 | 출자금 - 우리은행 1005-202-331599 (길목협동조합) | 프로그램 참가비 - 국민은행 421101-01-111510 (길목협동조합)
Copyright ⓒ 2013 Gilmok

Designed by Rorobra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